근자열 원자래

“공자는 인이란 ‘근자열 원자래’라고 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기뻐하고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인이라고 했습니다” (p92, “담론” 신영복저).

어질다는 의미를 이렇게 간략하게, 마음에 와닿게 정의하다니. 신영복 선생님의 책 “담론”을 읽다가 내 눈이 위 문장의 끝에 머무는 순간, 그 감동은 입안에 들어온 사탕의 민트향이 몸에 사아~ 퍼지고 내 몸 밖으로 잔잔하게 번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인(仁)”이라는 내면의 향기라는게 이런것인가보다. 강하지 않고 은은해서 곁에 더 있고 싶게 만들고, 강하지는 않아도 오래 남아 다시 찾아오게 하는. 처음엔 민트향처럼 느껴진 그 감동에 갑자기 무게가 실려 나를 짓누른다. 아… 너무나도 어려운,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인(仁)이구나.

좀 가벼워 지자 하는 마음에 목표를 수정해 본다. 근자열 원자래를 실천하지는 못해도, 이 은은한 향을 띈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이 되자. 멀리 있는 사람을 찾아오게 하지는 못해도 내가 마음 준, 하지만 지금은 멀리 있는 이를 찾아가는 사람이 되자. 가까이 있는 이들이 맘 편하게 내 곁에서 쉴 수 있게 하지는 못해도, 타인이 보낸 배려에 밝게 웃으며 고마운 마음을 꼭 표현하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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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잠실동 사람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먹는다. 이를테면 거울이 아니라 위장이다. 이 점을 간과할 때 오해가 발생한다.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충실히 보여주는 위장이 좋은 위장이 아닌 것처럼, 당대적 현실의 세목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 꼭 좋은 소설인 것은 아니다… 좋은 소설은 늘 현실보다 더 과잉이거나 결핍이고 더 느리거나 빠르다. 좋은 소설에는 ‘현실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긴장’이 있다. 그래서 현실을 설명하는 2차 담론으로 완전히 환원되어 탕진되지 않는다. 그것이 소설의 깊이고, 그것이 소설의 ‘현실성’을 구성한다” (p24,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저).

IMG_2615“현실과의 긴장”을 기다렸는데 끝까지 “현실 자체”를 고수한 책, 잠실동 사람들. 너무 많이 들어 이제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과열된 사교육과 학벌주의가 이 소설의 중심에 있다. 소설 안에는 감정이 고조되는 소용돌이도, 소설을 관통하는 큰 이야기 줄기도 없다. 없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서로 얽혀있는, 아는 듯 알지 못하는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해서 자기의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 중 어느 하나도 내가 마음을 주고 싶은 사람이 없다.

소설 마지막 챕터에 초등학생 지환이가 다친 비둘기를 집으로 데려온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한 어른 [과외 선생] 의 얼굴”을 쳐다보며 지환이는 “마치 자신이 커다란 어른이 되고 선생님이 작고 작은 어린아이가 된 느낌 (p438)”을 받는다. 지환이는 하나도 무서울 것 없는 것에 잔뜩 겁을 먹은 것이 어린아이라고 정의하나보다. 그래서 두려운게 없어지는게 어른이 되는 것이라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환이의 주변에는 하나같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할까봐 안절부절 겁을 내는, 타인에게 보내는 따스한 한마디조차 자기방어에서 나오는 겁쟁이 어른들만 있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다친 비둘기를 안았을 때 그 따스함에 우와!하고 탄성을 지른 지환이가 제일 어른일지도 모르겠다.

 

글쓰기의 본질

fountain-pen-1851096_960_720“글을 잘 쓰고 못 쓰고는 문장력의 차이 보다는 콘텐츠의 차이라고 생각해. 얼마나 새롭고 참신한 내용을 썼는지가 관건이지. 게다가 스타일의 경우 독자마다 선호하는 것이 다르기도 하고.”

글쓰기 연습을 어떻게 하냐는 내 질문에, 친구이자 내 과학동아 칼럼의 에디터 영혜는 글쓰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짚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전에 읽은 책 “글쓰기의 최전선(은유 지음, 메멘토)” 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있었다.

“글쓰기에서 문장을 바르게 쓰는 것과 글의 짜임을 배우고 주제를 담아내는 기술은 물론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어떤 글을 쓸 것인가’ 하는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탄탄한 문장력은 그다음이다. 열심히 잘 쓰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 ‘열심’이 어떤 가치를 낳는가 물어야 한다” (23).

“글이란 또 다른 생각(글)을 불러오는 대화와 소통 수단이어야 한다. 울림이 없는 글은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한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어야 좋은 글이다. 그러니 글쓰기 전에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글을 쓰기 전에 스스로에게 중얼중얼 설명하면서 자기부터 설득하는 오붓한 시간을 갖자” (129).

아… 내 질문이 잘못되었구나. 어떻게 글을 쓰느냐가 아니라 무슨 글을 쓰느냐를  먼저 고민했어야 했다. 글쓰기의 가장 좋은 연습은 글로 풀어낼 소재를 깊고 풍족하게 하는 것. 즉, 많이 읽고 많이 듣고 그리고 많이 생각하는 것이구나…

실력이 좋은 것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고 있는 에디터님으로 부터 오늘 하나 더 배웠다.

나 뿐만 아니라 너도 기억해주길…

버스 안, 내 옆자리에 할머니 한분이 앉으셨다.
70세는 훌쩍 넘어보이는 할머니의 팔에는 검버섯이 앉아있었고
얼굴에는
나이수만큼의 깊은 주름과 엷은 주름들이 자리해있었다.

본적 없는 이 낯선 할머니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내 아이가 기억할 우리엄마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나이든 할머니의 모습이겠구나.’

짙은 쌍커풀이 있는 큰 눈,
여리여리하게 가느다란 팔과 다리.
탤런트 김혜선씨를 닮았다고 하면
“어우 얘는~”
하며 손사래를 치는 우리엄마.

여자여자하면서도
내 은사님이 “혹시 교장선생님 아니신가?” 물으실 정도로
강단있게 생긴 우리 엄마.

하지만 나중에 내 아이가 태어나
할머니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때면
우리엄마의 이렇게 예쁜 모습은
세월이라는 힘에 살짝 지워져 있을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작은 다짐을 하나 했다.

한국에 있는 지금,
엄마와의 사진을 많이 찍어 두자고.
사진이 담을 수 있는것에는 한계가 있겠으나
우리 엄마가 이만큼 예쁘다는 사실을
나만이 아니라 내 아이도 기억했으면 한다.

caption: 아빠 유전자의 횡포(?!)로 인해 엄마의 큰 눈과 가느다란 다리는 내게서 발현되지 못했다. 아빠도 인정한다. 우리아빠 유전자가 잘못했다 ㅋㅋㅋ

쪼그라든 내 열정을 그들이 품어주었습니다

오케스트라에 참여한다는 것의 매력은 악보위에 적힌 2차원의 음악이 3차원으로 바뀌는 과정을 몸소 체험한다는 것이다.

뭐랄까… 음악이 켜켜이 쌓이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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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오기 한달전인 5월 초, 지영선배를 통해 알게된 대덕오케스트라에 지원하기 위해 오디션 영상을 만들면서 두려움이 앞섰다. 또다시 실패 할 것에 대한, 그래서 다시 내게 실망할 것에 대한 두려움. 2014년 가을이었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실력에 주눅이 든 나는 Harvard Dudley Orchestra를 1년만 하고 중간에 그만 두었다. 무책임한 행동이였다. 하지만 공연때 민폐를 끼치는 것 보다는 낫다고 판단했었다.

그리고는 1년전 DC로 이사와서 오케스트라 오디션을 보았고, 심사하는 사람들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떤 나는 오디션장을 떠나기 무섭게 ‘불합격’을 직감했다. 그리고는 역시나 불합격통지를 받았다.

이런데도 대덕오케스트라에 지원한 이유는… 짧은 오케스트라 활동 중 느낀 ‘합주’의 묘미를 다시한번 맛보고 싶었다. 내가 동경하는 ‘클래식 연주자’들과 함께 한다는 그 황홀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DC 오디션에서의 부끄러운 연주로 인해 콩알에서 좁쌀크기로 더 작아진 자신감에 자극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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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보다는 열정을 높이 사주신 악장님 덕분일까? 그렇게 비전공자로서, 대덕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서, 2017년 7월 8일 대전 예술의 전당 무대에 섰다.비올라 파트의 가장 뒤쪽. 관객석에 앉은 엄마 아빠가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자리에 있었지만 연주하는 내내 내게는 악장님, 수석님들, 전공 선생님들과 똑같은 조명이 떨어졌다.

함께해준 지영선배, 오케스트라 단원 선생님들, 장마비가 무섭게 내리는데에도 공연장을 찾아주신 은사님과 지인들께 감사한 시간이였다. 공연 팜플렛을 받자마자 자랑스레 내이름에 빨간펜으로 밑줄을 쭉 그은 우리 아빠와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였다.

연주회가 끝나고 오케스트라 연습이 없는 월요일 저녁. 이 허전한 마음에 욕심이 마구 채워진다. 다음번에는 비올라 단원 선생님들의 연주에 내 소리를 제대로 얹고 싶다는 욕심. 연주하면서도 지휘자님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하는 욕심. 더 따듯한, 좋은 소리를 내고 싶은 욕심. 그리고 앞으로도 무슨일이든 같은 열정을 품고 사는, 뜨거운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픈 욕심.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전화

마종기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해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책 <정희진처럼 읽기>의 저자 정희진은 위의 시를 ‘간절한 외로움’이라고 소개했다. “읽고 또 읽노라면 외로움이 몸에 가득 차서 손목이라도 그어 몸 안의 외로움을 빼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시는 내겐 수줍은 이의 사랑표현으로 다가왔다. 상대의 ‘여보세요’ 한마디에 순간 얼어붙을 것을 알기에 그사람이 없을 때 맘 놓고 전화를 한다. 대화는 없다. 하지만 목소리가 듣고 싶은 마음, 그래서 수화기를 드는 설렘, 반복되는 신호음에 맞추어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시에 가득하다.

빈 방을 채우고도 남아 그사람이 돌아올 때 까지 쌓여 있을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동안 수줍은 화자는 듣는이 없는 이야기를 모두 속삭였으리라. 전달되지 않아서, ‘부재중 전화 7건’ 이 찍히지 않아서, 그래서 상대가 나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해서 간절한 외로움이라고 하고 싶지 않다. 정말 외로운 사람은 누군가를 이렇게 품을 여유조차 없을 테니까.

<정희진처럼 읽기>에 소개된 참 멋진 시가 하나 더 있어 아래에 붙인다.

사랑법 첫째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반바지, 통통과 튼튼사이.

반바지가 뭐 그리 대수냐 라고 할지 모르지만 난 반바지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최근까지 나는 운동할 때를 빼놓고는 더운 한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면 “거의 매일 실험실에 가는데 실험실에서는 긴 바지를 입어야 하니까 반바지를 안사게 되더라고요”라고 둘러댔다. 어릴적부터 마른 체형과는 거리가 있었던 내 몸은 내게 컴플렉스였고, 가뜩이나 body image 에 자신 없는 나는 (“I do have a distorted body image.” 라고 인정해버려 주위사람을 당황시키기도 한다) 30도를 훌쩍 넘는 날에도 긴바지를 입고 밖을 나섰다.

올해 초, 출퇴근시 항상 듣는 팟 캐스트에서 “Dear Ijeawele, or A Feminist Manifesto in Fifteen Suggestions” 라는 책을 쓴 작가 Chimamanda Ngozi Adichie 와의 인터뷰가 있었다. 그녀의 15가지 제안 중 하나:

“Suggestion 10: Be deliberate about how you engage with her about her appearance. Encourage her participation in sports. Teach her to be physically active. I think this is important not only because of the obvious health benefits but because it can help with all the body-image insecurities that the world thrusts on girls.”

몸이란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움직이고 생활하는데에 필요한 도구라는 사실을 깨우치는데 운동만한게 또 있을까? 팟 캐스트를 들은 이후 테니스를 치고 돌아오는 길에 건물 유리창에 비친 내 다리에 눈길이 갔다. 어제와 별반 다름없는 통통하고 튼튼한 다리. 스키니 진을 입지는 못하지만 21km를 뛰어내는 다리이다. TV속 연예인들의 다리는 아니지만 축구, 농구, 테니스… 큰공, 작은공 구별 않고 공이란 공은 모두 쫓아가는 그런 다리이다.

쭈욱 뻗은 그녀들의 다리가 여전히 부럽다 (한국 여인들은 도대체 뭐먹고 사나요?). 돈 주고 살 수 있다면 아주 심각하게 고민도 해보겠다. “심미성: 80, 사용성: 20” 이 아닌, “심미성: 20, 사용성: 80” 이라는 평가지를 들고 나는 묻는다. 내 다리는 뭐하는 다리? 후자의 평가지가 썩 나쁘지는 않다.

책을 빌리러 도서관으로 나서는 길. 낮기온이 33도까지 치솟는다는 일기예보에 아무렇지 않게 반바지를 입는다. 여전히 민소매 티셔츠를 입으려면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듯 하다. 어찌 그리 작은 양의 천을 가지고 만들었나 싶은 비키니는 평생 입을 생각을 안할 듯 하다. 그래도 반바지는 입기 시작했다.

맨다리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이 꽤나 시원하다.